한밤의 도서관

신의 카르테

uragawa 2014. 11. 3. 22:04

이럴 때일수록 내 입에서는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는다.“짧은 만남이었지, 학사님.”

나는 쓸데없는 말을 거듭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빛바랜 단행본 한 권을 책상 위에 두었다.

시마자키 도손의 『동트기 전』.

“박식한 학사님에게 줄 책이 좀처럼 없어서 말이야.”

“저한테요?”

“읽은 적은 있겠지만.”

“꽤 옛날입니다.”

학사님의 흰 손이 『동트기 전』의 낡고 붉은 표지에 닿았다.

몇 번을 넘겼는지 알 수 없는 표지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때가 묻고 마모되어 너덜너덜해졌다. 상하권으로 나뉘어져있었을텐데, 수중에 남은 건 상권뿐이다.

“괴로운 이야기야.”

내 말에 학사님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재밌는 이야기도 아니고 기분 좋은 이야기도 아니야. 갈등과 고뇌가 한없이 계속되는 이야기지. 그 괴로운 와중에 조금씩 미래를 개척해 가는, 그야말로 착실한 이야기야.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고서점에서 손에 넣은 책이라네. 벽에 부딪쳤을 때 종종 이 책을 펼쳤어. 지금은 내 인생의 ‘동 트기 전’이라고 스스로 타이르면서.”



베테랑 의사가 많고, 식사할 시간이 있고, 밤에 일한 만큼 낮에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일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해결되어 있지 않다. 베테랑 의사는 적고, 식사를 할 틈도 없고, 낮이고 밤이고 잘 수가 없다. 그런 상황을 수련의들의  힘을 빌려 겨우 헤쳐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정론을 쏘아붙인다고 해도 우리는 그저 한 사람의 환자라도 더 구하기 위해 ‘그나마 나은’ 선택지를 고를 뿐이다.

백 년 후에는 이 중에 한 가지라도 해결되어 있길 바란다.



“선생님 성함은 흔히 접할 수 없는 모양의 글자잖아요. 신기하다 싶어서 써 봤어요.”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손을 뻗어 조용히 메모 용지를 집어 올렸다.

“써 보고 알았어요. 이건 ‘바르다’라는 글자네요.”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정답입니다.”

‘이치一’와 ‘토止’라는 글자를 그대로 합체하면 ‘정正’이라는 글자가 된다. 아버지가 반쯤 장난으로 지으신 것이다.

아즈미 씨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가만히 메모 용지의 문자를 응시했다.

“‘하나一에 멈추다止를 써서 바르다正라는 의미라니, 이 나이 먹도록 몰랐습니다. 하지만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앞으로 가는 데만 급급해서 점점 소중한 것을 버리고 가는 법이지요. 진짜 바르다는 것은 맨 처음 장소에 있는지도 몰라요.”



“선생님, 저는 쭉 제 신세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어요.”

뜻밖이다.

“남편은 마흔두 살에 뇌일혈로 급사했습니다. 그 후로 30년동안 정말 외롭게 살아왔습니다. 내내 외롭다 느끼면서 이유도 모른 채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겨우 외로움에 익숙했나 싶었더니 이런 큰 병을 앓고, 대학병원 선생님은 저를 버리고, 역시 고독하게…….제 인생은 그게 다였어요.”

아즈미 씨가 뱉어내는 입김이 하얗게 흐려지며 솟아올랐다.

도자이와 미즈나시 씨도 말없이 듣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엔 결국 이런 행복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에요.”

아즈미 씨는 한 마디 한 마디를 골라내듯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온화한 그 목소리는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와, 이윽고 온기가 되어 가슴속에 퍼져 나갔다.

나는 새삼 생각했다. 힘을 얻은 것은 바로 나라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확실히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그러나 이 사실을 전하기는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