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추적하려면 일정한 통화 시간이 필요합니다. 범인이 전화를 걸어오면 가능한 한 길게 얘기해주세요.”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틀에 박힌 듯한 대사를 한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이 대사가 진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역추적 같은 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상대가 뭐라뭐라하며 질질 끌어도 상대해주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재빨리 끊으면 된다.
나는 망각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재수학원에서의 2년도, 회사의 도산도, 약혼자를 잃은 것도 모두 잊었다. 그것들은 단순히 기록으로 내 안에 남아 있을 뿐이다. 수험생이 ‘태평양전쟁’이라는 글자를 기호로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의 수많은 불행을 한없이 질질 끌었다면 나는 정신병자로 지내다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됐을 거다.
아침 풍경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바퀴벌레처럼 부지런히 발을 놀려 역으로 모였고 통조림 상태로 전철에 밀어 넣어져 삶을 포기한 것 같은 눈빛으로 얼마 없는 산소를 찾아 헤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