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

uragawa 2013. 5. 11. 22:33

내가 뭔들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이런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강제로 이런 곳에 끌려와 망신만 당하다니, 괜히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실제로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한심했다. 후회든 분노든 사실은 한심한 나 자신을 비켜가기 위해 생겨난 감정일 뿐이었다.



햇살이 차츰 따뜻해졌다. 기온이 오르면 공기에 여러 가지 냄새가 섞이기 시작한다. 작은 강을 흐르는 맑은 물의 달콤함. 이제야 안간힘을 쓰며 흙을 뚫고 나오려는 연한 풀의 청초함. 어디선가 마른 가지를 태우는 고소함. 겨울 동안 깊은 산속 어디선가 죽은 동물의 썩은 냄새. 삼라만상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사내 이름은 요키 中



봄의 위력은 대단하다. 지금까지 단색으로 칙칙했던 화면이 순식간에 컬러풀하게 바뀐 느낌이다. 아무리 뛰어난 특수 촬영 기법을 동원해도 봄의 찬란한 경치 변화는 잡아낼 수 없을 것이다.

가무사리의 신 中



물 냄새는 여름이 가까워오면 더 짙어진다.

아니, 논에서 나는 냄새일지도 모르겠다. 달곰씁쓸하고 촉촉한 무게감이 있어 언제까지고 맡고 싶다.

여름은 정열을 쏟는다



해가 짧아졌다. 오후 5시가 되면 주위가 희미한 어둠에 깔린다. 까마귀가 울어대고 산 저편이 빨갛게 물들면, 하루의 작업을 마친다. 저녁 바람에 닿는 피부가 점점 차가워진다. 이때쯤이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다’는 만족감이 뜨겁게 올라온다. 한편 ‘이제 돌아가면 저녁 식사’라는 해방감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열정과 외로움이 겹치는 약간 모순적인 기분이다. 


은색의 별이 총총하다. 하늘엔 옅은 회색 구름이 걸려 있고, 가무사리 산의 능선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논에서는 무거워진 이삭을 매달고 있는 벼가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강물 소리가 잦아들 만큼 벌레들이 대 합창을 한다.

불타오르는 산 中